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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의 한계

Posted by 약간의여유
2014. 8. 29. 14:40 이런저런

사람의 앎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어떤 사물이나 관념에 대해서 과연 내가 알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면서도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을 인식한다는 의미보다 더 깊은 뜻이 있다. 인식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물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성을 파악하여 그 동질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면 안다는 말은 어떤 사물에 관련된 전체적인 특성을 온전히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 전체적인 특성에는 그것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과 다른 것과의 관계적 특성 등을 포괄한다. 사물의 고유한 특성은 그것이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성뿐만 아니라 다른 것과 공통되는 특성을 모두 포함한다. 따라서 단순한 인식만으로서는 어떠한 사물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결국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앎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하였다.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 어떠한 대상의 본질을 안다는 것일 것이다. 본질은 그것이 본래 가지는 성격으로서 변화지 않는 속성을 말한다고 정의해보자.

  모든 사물은 끝임없이 변화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관찰한 바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물이 끝임없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과연 그 사물의 모든 특성이 변화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물을 보더라도 그것이 기온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지만 그 본래적인 성질은 변화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얼음, 액체, 수증기 등의 특성은 다르다. 그런데 그 특성의 공통점은 없는가? 만약 공통점이 없다면 우리는 물의 본질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물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변화무쌍하여 우리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인데, 본질이란 그 대상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고 정의하였으므로, 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모든 사물에 적용한다면 본질이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물이 그 특성을 변화하더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공통된 특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물에 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특성이라는 것은 어차피 다른 사물과의 비교에서 판단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상대적인 것이 될 것이고 그 상대성은 다른 사물의 변화에 의하여 변화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본질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본질이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영원히 불확실한 세계라고 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가지는 안정성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안전하게 서 있는 것은 우리가 생존하는 동안 유효할 뿐이지, 땅이 영존할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 사물을 손으로 잡을 때 그것이 확실한 사물임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감각을 가질 수 있는 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을 가지면 세상은 홀연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 된다. 사실 사물이 영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모든 사람이 가진다. 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고, 과학자들도 사물이 계속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람사람을 대할 때에도 상대적인 것을 느끼지 않은가? 내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렇다. 내가 신뢰하는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다. 죽은 다음에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한 기억만이 나에게 남을 뿐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벗어나서는 그 사람을 실제적으로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변화유전하는 과정의 일부만을 차지할 뿐이라는 말인가?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확실한 것으로 붙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확실한 것으로 안도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사람은 신의 관념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세상의 유한함을 알게 되면 될 수록 무한한 존재가 실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떠한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러한 욕구가 필요하고 언젠가를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전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 욕구의 발원근거를 보면 대체적으로 그러함을 느낄 수 있다. 욕구가 채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 욕구는 굉장히 모순된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서도 채워질 수 없는 욕구는 맹목적이고 그것 자체가 매우 파괴적인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사람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생명이 유한하다면 그 욕구도 유한적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 때문에 무한히 원하기만 하는 것일까? 사람이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우리가 고요히 앉아서 생명의 파동을 느낄 때마다 여러 가지 욕구나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잦아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생명이란 그 유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란 그 능력의 확대를 원한다.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명의 유한성이 언제나 지속된다면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엇 때문에 영원한 것을 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영원을 원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영원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고 있고 느낄 수 있는 한도는 상대적인 것이 된다. 보통 100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100억년은 영원과 같은 시간이다.

  사람이 오래 산다면 그 능력을 확대할 수 있을까?

  오래 산다면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 지식이 증가할 것이다. 사람이 늙어갈수록 기억력은 줄어든다. 즉 새롭게 기억할 수 있는 량이 줄어들고 기억했던 것을 잊는 량이 늘어난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기억량과 망각량이 같아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량보다 망각량이 늘어나는 시점이 있을 것이다. 그 때부터는 그 사람이 가지는 지식은 감소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고 가정한다면 기억력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가정도 타당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경우에도 기억력이 감소한다고 한다면 언젠가는 기억의 0이 되는 시점이 있을 것이고 사람의 기억이 없는데도 살아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 동안 어떠한 지식을 추구한다면 그는 엄청한 지식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식의 유용성은 그 지식의 적용범위가 넓을 수도 증가한다. 참다운 지식은 그 유용성이 넓은 지식이다. 과학은 그 지식의 유용성을 계속해서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발달해왔다. 자연의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몇 가지 명제로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은 과학자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현재의 과학으로서는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명제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식의 유용성을 추구하는 과학이 고도화되면 될수록 우리가 암기해야 하는 지식의 양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과학이 추구하는 것이 지식의 단순화인데 과학을 하면 할 수록 지식이 복잡화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학의 방향성이 잘못되었거나 그 방법론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식의 양이 증가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현대 문명이 방대화되었고 관심의 폭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과학적 지식의 유용성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볼 것은 아니다. 예전의 주먹구구식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활용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점차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 것이다.


  어떠한 욕구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러한 욕구의 실현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명제는 아직 검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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