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셔의 작품세계와 매트릭스 너머의 진실 바라보기

Posted by 약간의여유
2014. 10. 2. 16:59 이런저런


위 그림은 메비우스의 띠를 좀더 멋있게 형상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확실한 수학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다소 아리송합니다. 안과 밖으로 나누는 이분법이 메비우스의 띠에서는 통하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절대적이라는 수학의 세계에서 비상식적인 세계의 일면을 살짝 들여다 봅니다. 


백문이불여일견

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청각적 정보의 양보다 시각적 정보의 양이 훨씬 많음을 뜻하는 걸 겁니다. 정보가 많아지면 더 확실한 판단이 가능해지니까요. 

그럼 보는 것을 믿어야 할까요? 

아래 작품을 보면 무엇인가 아리송한 것을 뛰어넘어 자신이 크게 잘못 보고 있다는 것을 즉각 알게 됩니다. 하지만 뭘 실수 했는지를 찾아내려면 한참을 그림이 뚫어지도록 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찾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내 눈이 뭐가 잘못된 거지?



사실 우리의 눈이 잘못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뇌가 잘못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속이는 것일까요?


위 두 그림은 모두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작품입니다.  에셔의 작품세계를 보통 눈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술이란 우리에게 보이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셔의 그림을 통해 눈을 믿을 수 없다는 진실을 보았고, 그 진실이 주는 현기증을 경험합니다. 


이 때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들"은 뇌가 우리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진실의 세계입니다. 이런 진실의 세계, 철학적으로는 칸트가 말하는 물 자체(Ding an sich)의 세계는 너무나 멀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리오가 가상세계의 너머에 있는 현실을 보았던 것처럼요. 리오는 자신이 the one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허한 세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믿음"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금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너는 세상 가운데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것 너머에 네가 진정 믿어야 할 세계는 도대체 어떤 모습인가 하고요. 


<추가>

세상이 공허하다고 해서 불가지론이나 상대론에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각자가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으니까요. 당장 우리에게는 행동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확신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불완전한 확신 속에서 타인과의 충돌이 발생할 때에는 상호작용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동화적으로 통합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끼리 모난 부분이 깎이면서 어느 순간엔가 진리에 조금씩 근접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날이 올 수도 있겠지요. 인간인 우리에게는 완벽하게 진리에 도달하는 경우란 없겠지요. 우리의 인식이 진리에 수렴해가는 과정을 밟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리 완고한 신념을 지닌 자라 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행위에 후회하는 마음을 갖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때에 언젠가는 있지 않을까요? 

꼭 매트릭스에 현혹된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 모두가 다 그럴 것이고, 극단적인 경우의 한 예로서 히틀러도 양심과 진리에 맞딱뜨리는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2014/09/23 - [사회와 학문] - 히틀러는 과연 양심의 고통을 느꼈을까?